불안장애의 원인을 찾은 것 같아요.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지금도 불안장애 증상이 올라오네요. 심장이 두근두근, 속은 울렁울렁 거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아무것도 못한 스스로의 자책감이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나 합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주 월요일이 3회차였어요. 지난 회차부터 상담사님은 제게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집에 와서 어머니와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가지셨을 때부터 이야기했어요. 임신을 했을 때, 낳았을 때 그리고 곧 돌아가신 외할머니 이야기까지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성장과정까지요.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 아빠는 물론 친척, 사촌에 동네 어른들까지 어쩜 그리 저를 아껴주시고 사랑스럽게 챙겨주셨는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 수록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4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었지만 내가 받은 사랑과 관심은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다 20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아버지 나이는 지금의 저와 비슷합니다. 아주 젊은 나이셨죠. 지금부터는 그날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나의 두려움 ‘마흔다섯’
내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는 그날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 나는 스물 한 살의 대학생이었고 아버지는 마흔다섯 이셨다. 사람들은 희망의 새천년을 노래불렀지만, 2000년은 우리 가족에게 절망의 해였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입대를 앞둔 나는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군 입대를 앞두고 들뜬 마음으로 면회를 생각하고 계셨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 찻길마저 한적한 그날. 야간 알바 후 잠든 나를 동생이 다급한 목소리로 깨웠다. 부랴부랴 달려간 곳은 단골 이발소였다.
아버지는 이제 겨우 한번 운전 연습을 해본 나에게 운전대를 맡기셨다. 두 번째 운전으로 아버지를 동네 병원으로 모셔갔다. 일요일이라 병원 문을 늦게 연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점심을 먹고 다시 오자는 말씀을 하셨고 우리는 집으로 출발했다. 그게 아버지로 부터 들은 마지막 목소리였다.
어머니께는 아침 출근길 배웅이, 여동생에게는 전날 저녁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모든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집 앞 농협 주차장에 비스듬히 세워진 차, 그 앞에서 인공호흡을 하던 나, 옆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 외롭고 무서웠던 그 순간. 단골 슈퍼에서 구급차를 불러달라 외쳤던 내 모습, 구급대원이 왔던 것, 뒤로 비켜섰던 것, 병원으로 향하는 구급차 안에서 들렸던 싸이렌 소리, 그 안에서 느꼈던 절망과 병원 응급실에서의 감당할 수 없는 결정들. 어머니께 전화를 걸던 그 순간, 병원 앞에서 다짐했던 기억들.
그 순간들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스물 한 살의 내가 겪었던 절망의 이천년처럼, 나도 아버지처럼 아내와 자식 둘을 두었다. 몇 달 뒤면 나도 그날의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된다. 그래서 겁이 난다. 환한 웃음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아질까 두렵다.
어머니는 그날을 이야기 하며, 항상 내가 대견했다고 하셨다. 힘든 내색 한번 안 했다고 하셨다. 군대를 가며 친구들에게 어머니와 동생 걱정만 했다고 했고, 군대에서 처음 썼던 편지에서도 내 이야기보다는 가족 걱정뿐 이었다고 하셨다.
수년이 지나 당시 내 또래의 아이들을 보며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셨다고 한다. 저렇게 어린 아이한데 큰 짐을 지웠구나 하며 씁쓸하셨다고.
벌써 24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당시를 기억하면 앞이 흐려집니다. 이후에 벌어진 우리 가족의 삶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안타까움 때문인 듯합니다. 그 때, 내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행동을 했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여전합니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그런 감정들이 무의식으로 저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는데 하는 죄책감과 무력감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될까 하는 두려움, 지금 내 가족들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불안함 등등 이 발현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